주제: 단문이냐 장문이냐
부제: 궈러나19가 가져온 대 ORPG 시대에 맞춘 어쩌구(feat. 새벽 2시).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트위터를 며칠동안 뜨겁게까진 아니어도 핫팩 정도로는 만들었던 RPG에서 장문의 적절성 논란을 보다가 생각난 것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개인의 경험은 최대한 빼고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경험적 데이터를 빼면 스키마가 무너지기에… 아주 듬뿍 들어갔습니다. 예.
1. 왜 장문 논란이 일어나는가.
간단히 정리하자면 첫 번째 이유는 시간 때문이다. RPG 세션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작업인데, 한 사람이 장문을 치고 있으면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기다리거나, 그 사이 진행되었던 이야기를 다시 되돌아가서 되짚어야한다.
두 번째는 도전의 기회 때문이다. 사실 위의 시간과 연결되긴 한다. 한정된 시간 내에 장문으로 어떠한 도전을 시도하는 경우, 그 도전이 잘못된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면 그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무산된다. 요약하자면 단문보다 장문이 소위 코스트가 많이 든다는 것.
세 번째는 역시 시간과도 관련이 있는데, "장문을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이다. 한 사람이 장문을 만들어내느라 1분~길게는 며칠까지 들인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동안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빼고 진행할 수도, 아니면 다른 걸 하고 올 수도 없는데.
나는 RPG를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하자마자 코로나19가 터져 오프라인 세션, TRPG는 못 해본 바로 그 세대이다. 아마 이런 논란은 TRPG 환경에서는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있다. TRPG는 실제로 대면 상황에서 하기 때문에 "내가 말할 때까지 다들 조용히 기다려달라"라고 하기 어렵다. 물론, 혼자 끊임없이 말해 스포트를 독점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서로 쳐다보며 이루어지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만으로도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게 아닌 이상 이런 것은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많은 경우의 친구들 모임처럼 말이다.
하지만 ORPG 상황에서는 다르다. 대부분의 ORPG 툴들은 "누가 지금 타이핑을 하고 있다"까지는 보여주지만, 그 이상은 없다. 이 사람이 뭘 얼마나 쓰고 있는지는 그 사람이 엔터를 칠 때까지 알 수 없다. 누군가 계속 타이핑을 하는게 눈으로 보이면, 아무래도 나머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를 마구 진행시키기는 힘들다.
2. 장문이 대체 무엇이길래.
단순히 장문, 긴 글이라고는 하지만 그 성격은 사람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어떤 사람은 환경 묘사를 길게 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캐릭터의 내면을 길게 쓰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연속된 행동 묘사를 길게 하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복합된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룰은 다른 플레이어의 캐릭터를 함부로 조종하는 것을 월권으로 보기에 보통 장문의 내용은 "내 캐릭터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된다.
나는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첫째로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사이 "자기 캐릭터의 이야기"만 쑥 진전시키기 쉬운 글이 되기 쉽다. 다른 사람들의 캐릭터를 조종할 수는 없으니, 내 캐에 대한 이야기만 구구절절 길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로 자기 캐릭터 내면의 무언가를 열심히 묘사하고 결론 내리는 경우가 많은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기가 정말 애매하다.
둘째는 정반대인데, 소위 "길게 썼지만 내용은 없는 글"이 등장하는 경우이다. 소설가 황석영 선생께서 가라사대 "주접을 떨고 있다"라고 하는 그것이다(정말 이렇게 말씀하신게 맞나 싶긴 한데 딱 이거다). 소위 "갑자기 나타난 시체를 보고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는 내용을 A4 한바닥으로 묘사하는 종류인데, 이러면 기다린 사람들은 이야기의 진전은 이루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한 셈이 되어버린다.
셋째는 세션 내의 비중의 문제이다. 한정된 시간을 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버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적은 시간을 나눠 써야한다.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된다.
그럼 다 같이 장문으로 진행하면?
공평하기야 하겠지만, 1인 당 2시간씩 잡아먹으면 4명이면 8시간이다. 법정 풀타임 근무 시간에 육박한다.
3. 왜 장문을 쓰는가.
대부분 여기서 "그냥 내 스타일이라"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사실 그 스타일을 나눠보면 몇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이건 정말 경험에 의해서 구분해야하는데…….
첫째로 그냥 자세한 묘사나 수식의 나열을 좋아하는 타입이다. 이 경우 단순히 가게에 가서 볼펜을 산다는 과정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파란 문에 은색 문고리가 반짝이는, 하지만 오래된 유리가 약간 뿌얘져 안이 보이지 않는 문구점의 문을 엽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포근한 노란 빛으로 감싸인 문구점 안에서 인상 좋은 주인이 푸근하게 웃으며 인사합니다. 내 캐릭터는 두 세대에 걸쳐 쌓은 듯한 물건들을 헤치고 들어가 그나마 최신 볼펜들이 놓인 곳을 찾아 헤맵니다. 고풍스럽고 비싼 만년필이 진열된 검정 벨벳이 깔린 매대를 지나, 불을 켜지 않은 할로겐 램프 너머, 오래 되었지만 채도가 선명한 색연필 세트를 지나, 어린 시절 자주 쓰던 추억의 요술 연필을 발견하고 탄성을 지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을 살 때가 아닙니다……(하략)"
대체 볼펜은 언제 사는건가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그냥 자신이 생각한 것을 최대한 똑같이 모두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안 그래도 되는데.
참고로 윗 문장 쓰는데 3분 좀 안 걸렸다. ORPG에서 3분 동안 아무 대사도 올라오지 않는다? 3분 내리 모니터랑 눈싸움만 하란 건가.
둘째로 자기 캐릭터를 멋지게 드러내고 싶은 경우이다. 소위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에서야 이럴 수 있지만, 모든 장면에서 이러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든다. 게다가 이런 경우 PL들이 서로 다른 캐릭터보다 내 캐릭터가 돋보이길 원하게 되면 골치아파진다. 길이가 서로 에스컬레이트 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해서.
세번째는 좀 애매한데, 1:1 세션에 익숙해져 있는 타입이다. 다인 세션에 비해 1:1세션은 참가자가 단 둘이며, 둘이서만 반응을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서로가 할 말이 다인 세션보다 많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때의 감각을 다인을 상대로 적용해버리면 여러 사람을 두고도 단 한 사람하고만 대화를 하는 모습을 취하고 만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기다리는 시간+읽는 시간동안 소외당하고 만다.
넷째는 문장을 그냥 길게 쓰는 경우, 그냥 마침표와 쉼표가 적은 사법판결문 스타일이다. 사실 이런 스타일은 별로 없다. 게다가 많은 경우 문장의 주술목이 매칭이 잘 안 된다. 왈도체를 능가하는 비문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읽어도 뭔 소린지 모르게 만들고 만다. 주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면 발생하는 경우다.
다섯째는 생각이 많은 경우다. 그간 곰곰이 혼자 생각한 내용을 갑자기 쏟아내는 경우인데, 이 경우는 세션 내내 장문을 사용하진 않는다. 오히려 조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빛을 발하는 경우라 긍정적이다.
사실 더 많을 터인데… 지금 생각나는 것들은 이 정도다.
3. 그깟 3분 좀 기다리면 덧나나?
사실 덧나진 않는다. 그리고 더 길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자꾸만 "논란"이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언가 문제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왜? 단순히 시간 소모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언성 듀엣 리프라이즈」에서는 게시판형 세션이라는 것도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되잖아?
4. 여기서부턴 정말 내 개인적 의견인데
실시간 온라인 세션, ORPG에서 장문 사용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즉, 자기가 생각한 '한 토막'을 혼자서 완결된 형태로 만들어 내보여버리게 되는 것이다. 실시간 세션이 아니라 릴레이 280자 소설 쓰기가 되어버린다(뭐, 더 길 수도 있다).
그게 왜 문제냐?
다들 똑 같은 것 - 서로 한 꼭지씩 완성하고, 릴레이 식으로, 혹은 마이크 돌려가며 연설하는, 혹은 발표회 식으로 세션을 진행 - 을 하러 왔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게 위의 언성 듀엣에서 제시하는 게시판형 세션의 형태이다. 다만 게시판형 세션은 실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실시간으로 이 형태를 취해버리면,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뭘 할 것인가? 뜨개질이라도 할까? 눈은 화면 보고 있잖아. 어차피 손은 노는데. 세션 한 번 할 때마다 소매 한 짝씩 나오게 생겼다. 캠페인이면 겨울 옷 장만 아주 거뜬하겠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을 기대하고 온 것이 아닌 사람이 섞인 경우"에 발생한다.
TRPG 환경을 생각하고, 즉각적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중간중간 응응,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등등의 추임새를 넣어가다 거기서 또 다른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그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고 온 사람은 장문이 올라오면 거기에 추임새 하나 넣고 한참 기다리고, 추임새 하나 넣고 또 한참 기다리고……. 장문 쓰는 사람은 즐거울 것이다. 실시간으로 감상 리플이 달리고 있으니까.
감상 리플이라고 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문장과 작품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는, 추임새만을 바라는 사람이 장문을 구사하면 진짜 문제, 거의 비극이 된다. 이런 사람은 세션 전체를 자기 캐의 이야기로 만들길 바란다. 자신의 캐릭터만 주연이고, 나머지는 자신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해줄, 완성시키기 위한 재료로써의 조연인 것이다.
장문을 구사하는 탁은 대부분 "누군가 타이핑을 하는 동안 끼어들면 비매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버리면 장문을 만드는 중인 사람 빼고 나머지가 이야기를 진행시켜버리기 때문에 타이핑 중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것을 "내가 말 만드는 동안 누구도 끼어들지 마라"라는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왕왕 벌어진다.
이게 제일 문제다.
세션에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나의 완성된 작품 발표 - 타인의 찬사와 갈채 - 다음 사람의 완성된 작품 발표 - 반복."으로 국한해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 이야기를 봐라!"를 강경 주장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발표"를 주목해서 보기나 할까? 내 이야기 부지런히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박수 칠 때만 기다리고 있기가 십상이다. "정말로 딴청을 한 것도 아니라는데 문장 만드는데 오래 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기억 못 한다"면 대부분 이거다(물론 딴청 안 했다는건 구라고 다른 걸 하고 오는 경우도 많긴 하다. 왜냐면 "이 세션은 나를 위한 시간이니까 나를 위한 행동은 뭘 해도 되기 때문에.").
5. 그럼 모두가 단문을 쓰면 만사 해결되겠네?
아쉽게도 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단문을 구사한대도, 타인이 끼어들기 어렵게 만드는 테크닉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캐릭터가 아닌 플레이어가(짧게 말하면, 사담) 저 말 아직 안 끝났어요라고 하는 것은 양반이요, 문장을 완전히 끝내지 않은 채 엔터를 치는 치사한 수법도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내가
너에게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는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예전부터 내가
이런 식으로 문장을 올려버리는 수법이다. 원래 연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ORPG여서 가능한 테크닉이지만(그리고 그런만큼 상당히 드물게 나타나는 패턴이기도 하다), 그냥 말 할 때도 이런 방식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마침표나 쉼표가 아니라 거기서 이어지는 다음 단어에서 문장을 끊어 말하는 사람. 보통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이 방법은 번쩍이는 등대처럼 "내 말 아직 안 끝났다"를 주위에 웅변한다.
6. 게임성 유무 논란이 있던데?
이 부분은 참 애매한데, 이건 단장문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으로서의 룰을 지키고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인세인인데 GM과 PL이 몇 마디 주고받더니 감동 먹었다며 해당 플레이어만 메인 행동(판정)을 한 번 더 준다거나(은근히 있다), CoC인데 제 캐릭터는 무술의 고수라는 설정이니까 제 근접전 성공은 무조건 극단 처리해주세요 같은 요청을 수호자가 오케이하는 터무니없는 상황이다(거의 없다).
이건 단장문 여부를 떠나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장문을 구사하며 이기적인 사람이 주로 이래서 장문과 잘 엮인다. 그러나 장문을 구사하며 이기적인 사람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경우야 많지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모두가 장문을 구사한다고는 볼 수 없다. 5 참조.
또한 성공과 실패의 난이도 문제도 왕왕 돌던데, 그것도 역시 단장문과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본다.
핵심은 "이기적인" 이다.
6. 단문, 장문의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세션을 자신의 무대로 만들고 타인은 아주 수동적인 상호작용,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한 리액션만 하다 끝나는 장이 되기를, 주인공이 자신이고 자신이 멋진 주인공이 되는 것을 세션 참가자 모두가 황홀하게 즐기고 그 세션의 참가자 모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덕분에" 뻐렁쳤다며 환호를 바치기를 바라는, 그리하여 나의 즐거움이 곧 만인의 즐거움이 되고 그런 기회를 만든 자신을 존경하기를 마인드가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장문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다 이렇다는 게 아니다.
"이런 의도로 장문을 구사하는 놈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며, 이런 놈들 몇몇이 실개천 다 흐려놓으면 그냥 좀 시간 들여서 길게 쓴 사람까지도 "얘도 그 부류구나"로 보이기가 쉽다. 잠깐 자기 캐릭터가 스포트를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까지도 오해 받기 십상이다.
오해가 아닌 것 같다? 그럴 수 있다.
실제로 세션에서 "남의 찬사로 자기 자존심, 허영심, 자아도취 채우기"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대놓고 "나는 세션 독점해서 내 쫀심 좀 재활하려고 세션 왔다"고 하지 않는다. 남들 다 튀어버리니까. 그냥 "제가 묘사하는 것 좀 좋아해서 남들보다 약간 시간 길게 쓰긴 하는데 여러분 하는 거 다 보고 있고 금방 따라가니까요."라고 한다. 이기적이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하는 것이다(뭐, 생각해보니 여기에도 이견이 많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냅다 별 거지발싸개똥믈리에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당한 사람은 꼴도 보기 싫은 놈과의 기억을 세세히 되살려 뜯어보고 분석하기는 짜증나니, 결국 "장문 쓰는 놈들 대부분이 저만 알고 시간 다 잡아 처먹는다"라고 싸잡아 매도하고 끝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장문이 문제가 아니다.
이기적인 새끼가 문제다.
나도 두 줄이면 될 말을 무려 6페이지에 걸쳐서 썼으니, 어엿한 장문 구사자구만.
전 세션에서는 단문 선호합니다. 여긴 티슷이니까 줄줄 쓰는거.